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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울

조선왕릉 돌기 그 마지막

 

조선왕릉을 다 돌았고 그 마지막 연산군묘를 찾아갔다.

주차장이 없다고 하여 자전거를 타고 혼자 갔다.

연산군일기가 그림과 함께 벽에 장식되어 있는 걸보니 맞게 찾아가는 것이다.

근처에 정의공주묘도 있었다.

연산군묘보다 큰 길가에 있었고, 연산군묘는 골목으로 꺾여들어가 일반주택과 담을 마주하고 있었으며

이정표가 없으면 찾기 쉽지가 않아보였다.

절대권력을 추구하다보니 유교 이념을 따르지 않았고 신하들의 간섭이 못마땅했던 연산.

쫓겨난 왕이고 폭군이라 불리우니 사후 대접이 초라하고 다른 왕릉에 비해 협소하기 짝이 없다.

입장료도 없고 유네스코 세계유산도 아니지만 관리하는 사람이 추석을 앞두고 물도 주고 잡초도 제거하고 있었다.

 

연산군 묘 아래에 태종의 후궁의 묘가 있고, 더 아래로는 딸과 사위의 묘가 있어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자식이었지만,성종의 적장자이었기 때문에 7세에 세자가 되었고 12년동안 왕세자 수업을 받는다. 그리고 19세에 아버지 성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10대 임금에 즉위한다.

 

성종은 원자의 모후를 폐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에도 두 번째 왕비였던 윤씨를 폐위시켰다. 그리고 어린 원자가 자신의 어머니가 폐위되고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는데 그걸 끝까지 모르리라 생각했을까?

세자 융(연산)은 성인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생모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지 못하고 성종의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 밑에서 자랐다. 성종도 학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연산을 못 마땅하게 여겼단다. 그리고 세자 융과 정현왕후 사이에는 특별한 정이 없었다. 윤씨를 쫓아낸 장본인인 할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 역시 마음의 짐 때문인지 손자인 연산군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연산군은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야사에 의하면 연산군은 할머니 인수대비를 찾아가 자기 어머니를 죽음에 몰게 하였다며 머리로 들이받았다는 패륜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연산군은 손에 피를 묻히면서까지 어머니를 제안왕후로 추승한다. 이로써 폐비윤씨는 아들을 통해 잠시나마 왕후의 이름을 갖게 된다.

 

연산은 천명의 기생을 두고 그중에 재주와 미모가 아름다운 기생은 '흥청'이라 불렀다. 여기서 유래한 것이 흥청망청.

 

연산의 마지막 유언은 신씨(연산군의 아내)를 보고 싶다고 하였다.

평소에는 장녹수를 가까이하더니,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조강지처를 그리워한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왕릉이라면 이렇게 가까이 볼 수 없었을텐데,

그렇지 않아 이렇게 한바퀴 둘러보고 석상도 볼 수 있었다. 날도 좋아 비스듬히 서 있는 나무에 기대니

파란 하늘과 높은 구름을 배경으로 낮은 곳에 위치한 하얀 구름이 서편으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좀작살나무의 열매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고 바로 앞에는 오래된 방학동 은행나무가 연산군을 보위하듯 서 있었다.

 

정의공주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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