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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선조의 질투와 광해의 불안

 광해군의 묘를 찾아갔다와서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찾아 읽었다.

그러다가 든 생각은 광해군이 왕에서 쫓겨나 저렇게 왕릉이 아닌 묘에 묻히게 된 것은 한마디로 광해의 아버지인 선조의 아들 광해를 향한 질투와 광해군의 불안이 낳은 결과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찌질하게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도망 다니기에 급급한 반면에 아들인 광해는 전쟁 중에 민심을 다독이고 군사들을 독려하여 백성들의 신임을 얻는다. 그러니 선조로서는 광해에게 질투를 느끼게 되고, 광해는 서자에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명으로 부터 왕의 제가를 얻지 못하고 안으로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세력과 신분으로 인한 불안을 느낀다.

 

지나치게 사람의 행동 이면에 존재하는 인간 심리를 찾아보는 내 과민함이 빚은 확대 해석의 가능성도 있지만 여러 요인들 중에 광해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선조의 질투와 광해의 불안이라 여겨졌다.

 

 

<광해군의 일대기를 요약해 보자면.......>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선조의 마음은 후궁으로 기울었고 이때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공빈 김씨다.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연년생으로 낳았다.

 

광해군이 3살 때 어머니인 공빈김씨가 세상을 떠나고 선조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는 인빈 김씨다. 자연히 임해군과 광해군은 선조의 마음에서 멀어졌고 인빈 김씨가 낳은 왕자들이 사랑을 받았다. 그중에서 선조는 신성군에게 마음이 있었다. 임해군이 사고나 치는 문제아로 성장한데는 이런 환경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형과는 달리 광해군은 모범생으로 자라 신하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삼을 것을 청했다가 실각된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아직 어린 신성군을 포기하고, 광해군을 세자로 삼게 된다. 신성군은 피난 중에 죽는다. 전쟁 중이라 세자 광해는 분조(나뉜 조정)를 이끌고 함경도로 향한다.

 도망다니기 바쁜 아버지 선조와는 달리 광해군은 분조활동을 하면서 백성들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러자 선조는 광해군을 질투하게 된다. 선조는 위기 때마다 스무번 가까이나 치사하게 선위 소동(왕의 자리를 광해군에게 넘기겠다고 했다가 거둬들이는 소동)을 벌이며 위기를 벗어난다.

 

당시 동인과 서인의 대립 속에서 동인의 강경파가 유성룡을 못마땅하게 여긴 데다가 이황의 제자들과 조식의 제자들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동인을 남인과 북인으로 가르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천민, 양민들 중에서 신분상승을 이룬 이들이 많이 나왔는데 적의 목을 많이 베면 벨수록 좋은 조건이 제시되었는데 관리가 허술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적의 목을 벤것을 계산하면 왜놈들이 거의 없어져야 할 정도였다.

 

이순신도 전사하고 권율도 전쟁이 끝난 직후 세상을 뜨고, 김시민 조헌 김천일 등 의병들도 거의가 전사했다. 살아남은 곽재우는 전쟁이 끝나자 산으로 들어가  곡식을 끊고 나물, 열매 등으로 사는 삶을 택한다. 결국 선조에 눈에 가시같은 광해만이 남은 것이다. 나라를 패망으로 이끈 왕과 백관들, 사대부들이 다시 전쟁 이후를 이끌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되었고 백성들은 더욱 힘든 세월을 보낸다.

 

광해군을 명나라에서는 서자에다 둘째 아들이라 세자로 인정을 하지 않았고, 안에선 아버지 선조가 미워하는 와중에 선조 39년에 인목왕후는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는다. 그렇게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전쟁이 끝난 뒤 10년을 울분과 두려움 속에 보내야 했던 광해군이다. 정국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의 대결국면으로 치달았다.

 

영창대군이 3살이 되었을 때 선조가 세상을 떠난다. 

영창대군이 왕위를 계승케하고 수렴청정을 권하는 신하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중전은 광해군을 보위에 올린다. 명에서 실사를 나오는 와중에 광해의 형인 임해군은 죽음을 당한다. 광해군 1년 6월 마침내 명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

 

이후 4년간 광해군은 용비어천가를 비롯 내훈,삼강행실도 등을 인쇄 보급하고 고려사, 국조보감등의 책들도 복간하고, 동의보감이 완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창덕궁 복원공사도 마무리하며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의 업적을 남긴다.

 

영민한 두뇌와 풍부한 경험의 소유자 답게 왕은 일에 대한 이해도 빨랐고, 누르하치의 세력 팽창으로 인한 북방 안보 불안에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광해군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군주다. 그의 총명함을 집어 감킨 것은 바로 옥사였다.

세자시절의 불안이 투영되어 역모라고 하면 적당히 넘어가질 않았다. 역모사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 나머지 직접고문을 명했고, 고문으로 얻은 진술을 의심하려 하지 않았다. 고문은 새로운 진술을 낳고 새로운 진술은 연루자를 확대시켰다. 왕의 스타일을 간파한 이이첨의 강경론이 먹혀 들었던 것이다. 왕은 매일같이 나와 친국했고 계속 새로운 사람들이 잡혀 들어왔다. 옥사는 7개월을 끌고서야 마무리 되었다. 340명이 끌려왔고 100여집안이 파멸했다.

 

영창대군도 9살에 귀양가서 죽게 된다.

 

천하가 온통 이이첨의 것처럼 비쳐지던 광해군 8년 그의 전횡을 비판하는 성균관 유생의 상소 한 장이 이이첨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상소를 올린 유생은 윤선도. 이일로 윤선도는 유배길에 오른다.

 

이때 이이첨의 후원에 힘입어 왕의 신임을 얻은 허균이 폐모론을 주창한다.

하지만 이이첨의 배신으로 허균은 귀양길에 오르게 되고 마침내 역모의 혐의가 씌어지고 처형된다.

 

한편 대외적으로 누루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기 이른다.

이때 명나라가 구원을 요청할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이야기에 광해는 우리나라가 중국처럼 병농을 분리해 군사를 양성해 온 것이 아니니 반대한다. 강대국인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지....지금 우리나라가 중국과 미국 사이에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명나라의 파병요청에 강홍립을 도원수로 1만여 병사사 출병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패하고 만다. 

패한 강홍립의 죄를 물으라고 하지만 광해의 생각은 달랐다. 

강홍립이 광해의 의중을 파악하고 후금에 적대할 의사가 없음을 알리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잘 한 일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후금의 기세가 아무리 강해도 명나라를 배신하면 안된다는 것이 당시 사대부와 백관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성리학 이데올로기, 중국에 대한 명분론의 도그마에서 벗어난 유일한 사람이 광해였으니 힘들었을 것 같았다.

 

수많은 옥사를 치르고 나서야 자신이 지나쳤음을 깨달은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역모사건을 그냥 넘기는 바람에 인조반정이 성공을 거두고 광해는 유배를 떠난다. 유배지 제주에서 인조 19년 67세가 되어 숨을 거둔다. 생각보다 유배지에서 오래 산 것이다. 아마도 복권의 꿈을 꾸면서 버텼을 것이다.

 

 

 

광해군묘는 왕릉이 아님에도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