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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백봉산


상봉역에서 경의중앙선을 갈아타고 도농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서 도착한 남양주시청앞



남양주시청 길건너 등산로 입구에서 지도를 보고 출발 10시 20분경





가파른 길이지만 흙길이라 걷기는 편했음




능선을 따라가다보니 왼편 아래쪽으로 평내 호평 아파트지구가....






누군가 하트를 새겨놓고.....지나가는 사람들이 낙엽등으로 항상 장식이 되어있다고 자주 이 산을 오르던 산행 대장님이 그러신다.




새가 먹이를 먹다가 포르르 달아났다.



백봉산 정상 해발 587미터




이제 묘적사쪽으로 하산....



이 나뭇잎 모양이 마치 생선 박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 나무의 이름이 박대나무라고 한단다.




40여 년을 함께 알고 지낸 동료 선배들과의 산행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와 당도한 묘적사

묘적사는 남양주시 와부면 월문리 222번지 묘적산(妙寂山) 자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이다.

흔히 백봉산(柏峰山)이라 불리는 묘적산의 남쪽 골짜기 아늑한 곳에 묘적사가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하나, 그 뒤 조선 초기까지의 역사는 미상이며, 조선 중기에 폐허화되었다. 김교헌(金敎憲)이 쓴 「묘적사 산신각창건기(山神閣創建記)」에 의하면, 수백 년 동안 소규모의 사찰로 명맥만 이어오던 것을 1895년 봄 규오(圭旿)가 이 절에 와서 시주를 얻어 산신각을 짓고, 오랫동안 이 절에 있었던 산왕신상(山王神像)을 봉안하였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여러 문헌들에서 사찰의 존재는 살필 수 있으나, 사적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된 바가 없으며, 단지 절 앞마당에 세워져 있는 팔각칠층석탑만이 오래된 세월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런데 절에서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묘적사는 승병(僧兵)양성 도량이었다고 한다.

주지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묘적사는 본래 국왕 직속의 비밀기구가 있던 곳으로 왕실산하의 비밀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해 절을 짓고, 선발된 인원을 승려로 출가시켜 고도의 군사훈련을 받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이유로 임진왜란 때 집중 공격을 받아 폐허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 말을 증명하듯 절에서 동쪽으로 5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활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평탄한 대지가 있고, 이곳에서는 간혹 화살촉이 발견되곤 한다.

우리나라는 호국불교라는 이념 아래 임진왜란과 병사호란 등 국난 때마다 많은 승려들이 국가 수호의 첨병으로 앞장섰다.

아마도 이 곳 묘적사 역시 승려들이 무예를 갈고 닦는 수련장으로 활용이 되었던 것 같다. 또한 최근에 들어서도 이러한 묘적사의 성격을 이해한 박정희대통령이 과거와 같은 호국교육장으로서 복원을 하고자 했으나 대통령의 죽음으로 중지되었다고 한다.

* 묘적사 내 볼거리 *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승방·요사채 2동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비롯하여 후불탱화와 산신·칠성탱화가 모셔져 있다.

유물로는 남양주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된 팔각칠층석탑이 유명하다.

이 탑은 월정사팔각구층석탑·수종사(水鐘寺)오층석탑과 양식이 비슷하여 조선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3층과 4층 사이의 체감률이 부자연스럽고 절에서 동쪽으로 30m 가량 되는 곳에 탑재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본래 7층은 아니고 대략 11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백과참조>




팔각다층석탑에 풍경이 매달려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바람이 불자 일제히 소리를 낸다.




아마도 이효리가 이절에서 템플스테이를 했었나 보다.





버스를 타고 덕소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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